방송 노동시장과 “종편 효과”라는 환상

방송 노동시장과 “종편 효과”라는 환상

*김동원 공공미디어연구소 연구1팀장이 언론노조 KBS본부 노보 39호(6월 2일자 발행)에 기고한 글을 필자와 KBS본부의 동의를 얻어 게재합니다.

방송제작현장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처음으로 인터뷰를 다니던 몇 년 전, 가장 낯설었던 것 중 하나는 ‘전문용어’, 그러니까 일본식 속어들이었다. ‘혼방’, ‘데모찌’, ‘아시’, ‘나라비 쇼’, ‘아사모사’ 등등. 지금이야 많이 기억도 나지 않지만 녹취를 정리하며 몇몇 용어들은 건설현장에서 쓰는 말과 거의 똑같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일본어뿐 아니라 건설 수주에서 흔히 쓰이는 ‘턴키(turnkey)’가 그렇듯 말이다. 제작 현장에 있지 않은 연구자로서 갖는 선입견일 수도 있으나 한국 방송 산업의 노동시장과 제작방식은 건설현장의 그것과 너무도 유사하다. 인하우스건 외주제작이건 상당수의 프로그램들은 다양한 분야의 노동자들이 일정 기간 모였다 흩어지기를 반복하는 ‘프로젝트형 노동시장’의 전형이기 때문이다.

물론 일부 산업분야나 외국의 경우도 이런 유형의 노동시장과 제작방식이 일반적이기는 하나, 한국의 경우는 여기에 정상적인 노동력의 고용과 운용방식이 적용되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예외적이다. 지난 3월 말, 몇 명의 VJ들이 KBS와 대법원까지 가는 법정 공방 끝에 겨우 노동자성과 부당해고를 인정받은 사례가 그렇다. 여기에 굳이 한국방송의 노동시장은 ‘바우처’와 같이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고용방식이 횡횡하는 “비정규직의 백화점”이란 설명을 길게 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이렇게 예외적인 구조와 제작 현장의 일본식 속어들에 나날이 발전해 가는 미디어 테크놀로지와 미국식 방송 제도를 오버랩 시키자니 묘한 풍경이 그려진다. 이런 풍경을 두고 한국 방송산업의 ‘전근대성’이라 부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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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노동 시장의 “자유로운 노동자”

MBC 여운혁 PD가 중앙종편으로 이직했다는 소식, 그리고 몇몇 PD들이 종편으로부터 러브콜을 받고 있다는 얘기들이 쏟아져 나왔다. 이 와중에 중앙종편의 주철환 제작본부장은 <PD저널>과의 통화에서 “한국 사회는 직장 선택의 자유가 있고 뜻을 펼칠 수 있다고 생각하면 (다른 방송사로)오는 것이다”라고 말하며 그 정당성을 주장했다(PD저널 4월 22일). 맞는 말이다. 방송 노동자들에겐 분명히 “자유”가 있다. 그런데 이렇게 좋은 자유라는 말의 영어 표현인 free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직업선택의 자유와 같이 어떠한 예속으로부터도 벗어난다는 의미이며, 다른 하나는 sugar-free에서처럼 “~이 결여된”이라는 의미이다. 아주 오래 전 자본주의라는 새로운 삶의 방식이 도처에 퍼져나갈 때, 이러한 자유를 ‘맛본’ 이들은 바로 농노들이었다. 비록 폭력이 동원된 추방이기는 했지만 어쨌든 이들은 과거 한 명의 영주와 영지에 묶여 일해야 했던 예속에서 벗어나 도시의 어떤 고용주에게나 자신의 노동력을 팔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자유를 얻기 위해선 농노로서 그나마 갖고 있던 소작지나 농기구와 같은 생산수단, 즉 자신의 노동을 가치로 실현하기 위한 그 어떤 수단도 결여하고 있어야만 했다. 바로 이들이 진정한 자본주의의 근대적 임노동자, “자유로운 노동자”들이었다.

이렇게 본다면 방송 노동시장의 전근대성에도 불구하고 종편이나 CJ E&M과 같은 대형 제작사로 이직할 수 있는 이들이야 말로 진정한 의미의 임노동자, 가장 선진적인 노동자라 할만하다. 이들 역시 직업 선택의 자유와 함께 자신들의 작품을 걸 수 있는 인프라를 결여하고 있다는 점에서 또한 free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들은 또한 전근대적이다. 모두가 다 아는 사실지만, 유명PD 한 명의 이직이란 특급 연예인, 유명 작가 뿐 아니라 그와 인맥을 맺고 있는 다양한 외부 제작인력들의 대규모 이동을 뜻한다. 속칭 “사단”이라 불리우는 프로젝트형 노동시장의 특성으로 인해 이 같은 이직은 신규 인력의 창출보다 기존 노동시장 내 인력 재배치의 효과를 가져 온다. “지금의 방송사에서는 더 이상 연출을 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이직 사유에도 불구하고, 연출 유무를 떠나 종편이 원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노동시장 재배치 및 집단적 제작역량의 이전이다. 이 과정에서 앞서 말한 전근대성 또한 여전히 동반되리라는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다.

오지 않은 현실, 종편효과

종편은 정치적 입장이나 특혜 여부와 상관없이, 그리고 방송을 채 시작하지 않았음에도 이렇게 강력한 효과를 발휘하기 시작했다. 이직하는 PD들의 기사가 나올 때 마다 그 이름 앞에 <황금어장>, <무한도전>, <개그 콘서트>와 같은 높은 시청률의 프로그램명이 따라 붙는다. 이러한 기사만으로도 종편은 이미 시작하지도 않은 프로그램의 광고를 하게 되는 셈이다. 그러나 이직할 곳의 제작 인프라와 시장이 어떠한가에 상관없이 PD 한 명의 이직이 이전 프로그램의 질을 그대로 이전시킨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아직 현실에 출현하지 않은 종편의 미래는 이런 환상, 그러나 강력한 환상으로 작동하고 있다.

SBS가 최근 논란 속에 이뤄진 PD출신 보도본부장의 발령에 대해 “하반기에 8시에 뉴스를 하겠다는 종편 채널도 있고, 현재 주말에는 MBC뉴스와도 경쟁하고 있어 프로그램 경쟁력이 필요하다”며 “경영진이 뉴스에 PD적인 기획과 제작력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는 이유가 그러하다(미디어 오늘, 4월 21일자). 전혀 다른 이야기로 들리겠으나 최근 MBC의 한 예능 PD가 노보를 통해 “요즘 회사 돌아가는 것을 보면 조중동 방송보다 얼마나 더 나은 건가 싶다”는 탄식과 함께 전하는 사내 분위기 또한 마찬가지이다. 사측은 종편과의 경쟁력을 조직 및 편성 개편의 이유로, 이직을 고민하는 PD들은 종편과 다를 바 없는 전횡적 경영을 이유로 삼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종편의 강력함은 여기에 있는지도 모른다. 아직 시작도 하지 않은 종편, 그럼에도 이렇게 도처에 번지고 있는 이 뒤숭숭함은 가히 “종편 효과”라 할만하다.

“근대성”을 위한 종편의 역사적 사명?

돌이켜 보면 지상파 유명PD들의 이직이란 새로운 현상은 아니었다. 이미 2000년 전후에 기획사를 겸하는 대형 제작사들로의 대규모 이직 열풍이 있었다. 당시 송창의(세친구), 이승렬(국희), 정세호(청춘의 덫), 이진석(사랑해 당신) PD나 최완규(허준) 작가와 같은 이들이 <JOY TV>, <김종학 프로덕션>, <JS픽쳐스>와 같은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지금과 다른 점이 있다면 당시의 제작사들은 이직자들에게 높은 연봉 뿐 아니라 이후 회사가 주식시장에 상장될 경우의 옵션을 약속했었다. 그러나 지금의 종편은 투자한 기업이나 법인들조차 이탈 여부를 살피고 있는데다가, 그러한 지분 분배 또한 손쉽게 할 수 있는 형편이 아니니, 당시보다 더욱 불안한, 도박에 가까운 이직이 행해지고 있는 셈이다. 물론 상당한 경력과 작품이 있는 PD들의 경우 대형 제작사로의 또 다른 이직을 준비할 수 있겠지만, 그러한 PD나 연출자들은 극히 소수에 불과하다.

이런 사례를 놓고 보면, “종편 효과”란 그 어떤 물적 토대도 없는 환상이다. 경쟁력 강화, 정치적 입장, 연출에의 욕구, 새로운 도전 등등에도 불구하고 방송사 PD들과 같은 특수한 지위의 노동자들 또한 이직의 과정에서는 임노동자로서의 자신의 본질을 드러낼 수 밖에 없다. 오래 전, 마르크스가 명예와 열광, 감성에 따라오는 그 어떤 후광조차 차디찬 얼음물에 던져버리는 “냉혹한 현금계산”만이 남는다고 말한 자본주의의 사회적 관계는 오늘날 종편이 더욱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종편 효과라는 환상을 한꺼풀 더 벗겨보자. 냉혹한 현금 계산의 임노동 관계와 함께 또 다시 한국 방송 노동시장의 전근대성이 고개를 든다. 자유로운 노동자가 되기 전 농노들은 자신의 의지에 따라 자유롭게 노동력을 판매할 수 없는 “인격적 예속”에 놓여 있었다. 그 때와 같이 물리적 구속이 따르지는 않지만, 그보다 더한 인맥에 의해 얽혀진 수많은 비정규 미조직 노동자들이 이 자유로운 노동자 한 명의 이동에 요동칠 것이다. 이직 과정을 통해 자신의 자유로움을, 그리고 온전한 의미의 근대적 임노동자임을 한 명의 PD가 깨달았다 할지라도 그 이직의 조건인 이러한 전근대성은 여전히 지속된다. 이렇게 종편은 한 손엔 자유로운 노동자로서의 PD들을, 다른 손에는 지난 20여 년간 형성되어 온 비정규 방송노동자들을 움켜쥐고 경쟁에 나서려 한다. 바로 여기에 자본으로서의 종편이 행해야 할 역사적 사명이 있는지도 모른다. 유명PD들의 영입에서 자신들이 부르짖은 노동력 판매의 자유가 다른 손에 움켜 쥔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도 해당될 것인가? 종편 또한 철저한 자본이라면 한국 방송 노동시장에도 또한 그 냉혹한 근대성을 확립해야만 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갑’이었던 지상파 PD들과 영원한 ‘을’로 버텨왔던 비정규직들에게 장밋빛 미래를 약속하고 있는 종편의 자본주의적 사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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